책을 향한 사랑,
기록에 대한 열정
삶에서 책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고
종이가 없으면
감잎에라도 스쳐가는 생각을 붙잡아둔
책에 미치고 메모에
사로잡힌 옛사람들 이야기
이 책은 책과
메모를 둘러싼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책에 미친 책벌레들과 기록에 홀린 메모광들이
주인공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들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을 책벌레와 메모광으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책과 메모는 도대체 무슨 마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런 질문들에 옛사람들이 들려주는 대답과도 같다. 인문학 열풍 속에서 책과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고전 읽기와 글쓰기를 권하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그
속에서 독서와 기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옛 선비들은 세속의 부박한 목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독서와 메모는 일상이자 삶이었다. 이 책은 그 이야기를 담았다.
고서를 통해 본
책벌레의 문화사
장마철을 지나는
동안 꿉꿉한 방안에서 습기를 잔뜩 머금어 곰팡이가 피거나, 그 틈에 책벌레가 책 속에 복잡한
미로를 내면 책이 아예 못쓰게 된다. 다락방에 쌓아둔 책에는 쥐가 똥오줌을 싸놓기도 해서 냄새마저 고약하다.
이럴 때 시원한 선들바람에 책을 꺼내 마루와 마당 가득 펼치면 얼마 안 있어 바람결에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챙챙
댄다. 쇄서는 보통 초가을의 문턱인 칠석七夕에 했다. 이렇게 책갈피 사이에 시원한 바람을 한차례 불어넣어주고
나면 눅눅하다 못해
끈적대던 한지가 파닥파닥 되살아나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신명이 절로 붙었다. _33쪽
1부에는 옛 책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를 묶었다. 먼저 장서인을 다룬 글이 눈에 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장서인 찍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한국의 옛 책은 장서인이 지워진 경우가 많다. 혹시라도 책에 남은 장서인이 훗날
가문에 누가 될까봐 살림이 궁해 책을 내다 팔 때면 책을 훼손하면서까지 장서인의 흔적을 지웠다. 조상의 책을 잘
간수하지 못하고 팔아먹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본의 고서 가운데는 간혹 ‘소消’ 자 인장이 찍힌
책이 있다. 책을 입수하면 전 소유주의 장서인 위에 말소 도장을 찍고 그 옆에 새 주인인 자신의 장서인을 찍었던
것이다. 깔끔한 것이 일본인답지만 매몰찬 구석도 있다. 중국은 어떨까? 중국인들은 호방하게도 전 소유주들의
장서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손을 대지 않았다. 이 넓은 천하에 네 책 내 책이 어디 있냐는 듯이. 중국 고서에는
책의 유전流轉을
보여주는 장서인이 가득하다. 한자문화권 안에서도 책을 간수하는 태도는 나라마다 이렇듯 달랐다.
책벌레를 막기 위해
책장 사이에 끼워두었던 은행잎이나 운초芸草 이야기를 읽다보면 책을 사랑한 옛사람들의
그윽한 정취가 떠오른다. 100년도 더 된 책의 갈피에 압사당한 채 붙어 있던 모기 이야기는 「모기를 증오함憎蚊」
이란 시를 남긴 다산의 사례와 더불어 웃음을 자아낸다. 판각을 마친 뒤 몇 부만 인쇄하여 저자에게 교정용으로
제공한 홍인본紅印本, 파란색으로 인쇄한 재교용 남인본藍印本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빨갛고 파란 책들은 요즘도
수집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레어템’이라고 한다. 쓸 때는 선명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오징어 먹물
이야기도 재미있다. 오징어 먹물은 주로 사기꾼들이 계약문서에 많이 썼다고 한다. 다산도 애용했는데 그가 오징어
먹물로 쓴 글씨가
일부 박락된 채 남아 있다.
돈을 받고 남 대신
책을 베껴 써주는 일을 ‘용서傭書’라고 한다. 이 일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용서인들의 이야기는
애처롭다. 출판문화가 발달한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용서로 생계를 꾸린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 제일의 책벌레 이덕무도 그중 한 명이었던 듯 그의 편지에는 책을 베껴 쓰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다산이
제자들에게 필수로 교육했다는 초서?書, 즉 베껴 쓰기에 대한 글과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덕무의 구서재九書齋 이야기에서는 옛사람들이 어떤 체계로 책을 읽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